수운대신사와 창도(唱道) 정신

양반도 천민도 없이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근원적으로 모두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의 새로운 가르침은 당시 새로운 삶의 질서를 꿈꾸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동학 천도교를 창도한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의 이름은 최제우(崔濟愚)이다. 포덕(布德) 전(前) 36년(1824) 10월 28일 오늘의 경주시(慶州市) 현곡면(見谷面) 가정리(稼亭里)에서,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영남(嶺南) 일대에 그 문명(文名)이 높은 가난한 선비 최옥과 재가녀(再嫁女)인 한씨(韓氏)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과 재가녀의 아들이라는 출신 성분 등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대신사는 일찍이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높은 뜻을 지니고, 세상의 많은 가르침을 얻고자 천하를 돌아다녔다. 이러한 대신사의 젊은 날의 행적은 곧 구도(求道)를 위한 것이었다. 천도교에서는 ‘주유팔로(周遊八路)’라고 부른다.

주유팔로를 통하여 세상의 많은 가르침과 만나보았지만, 궁극적으로 이러한 기존의 가르침들은 세상의 어지러움을 구할 수 있는 진정한 도(道)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의와 낙망 속에서 세월을 보내던 이 무렵에 대신사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대신사가 자신의 처가(妻家) 동네인 울산(蔚山)에 머물고 있던 어느 봄날이었다. 세상의 어지러움을 근심하며 울산 인근의 여시바윗골에 있는 정자를 찾아 소일을 하던 대신사는 어느 신비한 이인(異人)을 만나 천서(天書)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 그 천서의 내용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이 안에는 ‘하늘에 기도를 하라(祈天)’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고 한다. 즉 세상을 구할 도를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하늘로부터, 나아가 안에서 구하라는 그러한 가르침으로 이해가 된다. 이후 대신사의 수행방법은 세상을 떠돌며 가르침을 구하던 행각을 그치고 하늘에 기도하는 수행으로 바뀌게 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실을 천도교에서는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부른다. 즉 을묘년(1855)에 하늘에서부터 천서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이후 대신사는 양산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 또는 적멸굴(寂滅窟) 등지에서 수행을 하였고, 마침내 고향인 경주 현곡면 구미산(龜尾山)에 위치한 용담정(龍潭亭)에서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게 되는 결정적인 종교 체험을 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통하여 대신사는 한울님으로부터 세상 사람들을 구한다는 ‘영부(靈符)’와 세상의 사람들을 가르칠 ‘주문(呪文)’을 받는다. 이때가 포덕 원년(1860)인 경신년 4월 5일이다. 따라서 천도교에서는 이 날을 천도교 원년(元年)으로 삼아 ‘천일기념일(天日紀念日)’로 기리고 있다. 기존의 모든 종교들은 창도자의 탄생일을 기준 삼아 그 종교의 기원으로 삼고 있는데 비하여, 천도교는 대신사가 득도(得道) 한 가장 큰 기념일로 삼고 있음이 독특하다.

대신사는 득도 이후, 거의 1년에 가까운 기간을 수행과 수련으로 시간을 보낸다. 이러한 수행 기간을 거친 후 포덕 2년(1861) 신유년 6월에 이르러 비로소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포덕(布德)을 시작하였다. 양반도 천민도 없이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근원적으로 모두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의 새로운 가르침은 당시 새로운 삶의 질서를 꿈꾸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게 된다. 그래서 대신사가 머무는 경주 용담정(龍潭亭)에는 연일 도에 들기를 청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북적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포덕과 세상 사람들의 많은 관심으로 인하여 대신사는 경상도 인근의 유생(儒生)들의 지목(指目)과 관청의 탄압을 받게 되고, 포덕 2년 11월에는 마침내 용담을 떠나 전라도 남원(南原) 교룡산성(蛟龍山城) 안에 있는 작은 암자 은적암(隱跡庵)으로 피신하여 한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이 곳 은적암에서 대신사는 동학의 중요 경전인 「논학문(論學文)」·「권학가(勸學歌)」·「도수사(道修詞)」 등을 저술하였다.

한 겨울을 보내고 다시 경주 용담으로 돌아왔으나, 지속되는 관의 탄압과 함께 포덕 4년(1863) 12월 10일 마침내 조선조 조정에서 파견한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 일행에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 수감되었다가, 포덕 5년(1864) 3월 10일 대구 장대(將臺)에서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명을 쓰고 참형을 당하였다. 대신사는 도를 지키기 위하여 순순히 체포의 오라를 받은 것이요, 천명(天命)을 지키기 위하여 참형의 형장으로 스스로 올라가 41세의 나이로 순도(殉道)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대신사는 당시 무너지고 있던 조선조의 전통 질서와 동양을 침범하던 서양의 근대적 질서를 동시에 비판하며,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신념체계(信念體系)로서의 동학을 창도하게 된다. 대신사에 의하여 창도된 동학은 안으로는 붕괴되고 있는 질서와 밖으로부터 조여오는 외세(外勢)의 침략에 의한 억압을 매우 주체적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 체계를 이룩하려고 했던, 우리의 역사 속에 자리하고 있는 ‘자생적(自生的) 근대’의 한 모습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동학은 창도와 아울러 안으로는 조선조의 봉건적인 질서와 충돌하게 되고, 밖으로는 서구의 침략과도 충돌하는 매우 지난(至難)한 고통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렇듯 고난의 길을 걷던 동학은 한때 조선조 사회가 지니고 있던 봉건성과 서구 열강(列强)의 침략이라는 탄압과 무력에 의하여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순도(殉道)를 하게 되고, 한때 붕괴의 위기를 맞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동학이 지닌 자생적 근대에의 열망을 받아들이지 못한 조선조 사회, 나아가 동양사회는 더욱 가중되는 혼란과 붕괴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서구 열강에 의하여 오랜 동안 침탈을 당하는 뼈아픈 대가(代價)를 치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혼란과 위기는 한 세기 이상의 시간이 지난 오늘에도 나타나고 있다. 즉 19세기 이후 새로운 모더니티로 제기되었던 양대 이념인 사회주의 체제도 무너졌고, 또한 자본주의 역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으므로, 진정 살아갈 바의 올바른 향방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음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따라서 양식 있는 동서양의 많은 사상가들은 이러한 오늘의 시대적 현상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신사는 이미 150년 전, 이러한 ‘위기와 절망’을 매우 선지적(先知的)으로 예감하고, 이에 대안이 될 수 있는 동학을 창도하였던 것이다.

대신사는 먼저 인류의 역사를 ‘우주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 인류의 역사를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나누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나아가 우주적인 순환사(循環史)의 관점에서 인류는 이제 막 선천(先天)의 마지막 시대에 서 있음을 설파하였다. 그래서 인류는 선천의 마지막 징후인 혼란과 타락에 빠져 있으며, 이는 곧 후천(後天)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하는 필연적인 모습임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즉 당시 19세기 중엽이라는 문란한 조선조의 사회 모습을 대신사는 선천의 마지막 징후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대신사는 이와 같은 징후가 비단 조선조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공동으로 겪고 있는 현상임을 갈파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선천의 시대를 보내고 새로운 후천의 시대를 인류가 매우 주체적으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당시 사회에 팽배되어 있던 각자위심(各自爲心)이라는 세상 사람들의 타락한 심성(心性)을 ‘한울님 마음’으로 ‘개벽(開闢)’할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강조하였던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어느 의미에서 대신사가 지적한 그 각자위심(各自爲心)이 어느 때보다도 극심하게 팽배되어 있는 시대이다. 따라서 오늘이라는 이 시대는 사회적으로, 이념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지극한 혼란을 겪고 있고, 그러므로 대신사가 주창(主唱)한 ‘다시 개벽’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시대임에 틀림이 없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보아 대신사의 가르침은 다만 ‘지난 우리의 역사 속’에 있었던 그러한 가르침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야 할, 필요하고 또 절실한 가르침이다. 이렇듯 후천개벽이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편 대신사를 천도교에서는 1세 교조(敎祖)라고 부른다.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대신사 약력

포덕전 36년(1824) 10월 28일 경주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에서 부친 경주 최씨 옥과 모친 한씨 사이에서 탄생하시다.
처음 이름은 제선(濟宣) 자는 도언(道彦) 이시다.
포덕전 29년(1831) 모친 환원하시다.
포덕전 20년(1840) 모친 환원하시다.
포덕전 20년(1840) 부친 근암공 환원하시다.
포덕전 18년(1842) 울산의 밀양 박씨와 혼인하시다.
포덕전 17년(1843) 집이 불타 용담정으로 이사하시다.
포덕전 16년(1844) 주유천하에 나서시다.
포덕전 6년(1854) 주유천하를 마치고 울산 호암동(일명 여시바윗골)에 초가 삼간을 짓고 구도의 수행에 들어가시다.
포덕전 5년(1855) 3월에 호암동에서 을묘천서를 받으시다.
포덕전 4년(1856) 양산 천성산 내원암에서 수행하시다가 숙부의 환원을 직관하시고 47일만에 하산하시다.
포덕전 3년(1857) 천성산 적멸굴에서 다시 49일간의 기도를 마치시다.
포덕전 1년(1859) 10월에 경영하던 철점이 파산되어 집과 땅을 채권자에게 넘기고 용담으로 돌아오시다.
포덕 1년(1860) 2월에 입춘시를 지으시며 구도의 결의를 다지시다. 이름 제선을 제우(濟愚)로, 자 도언을 성묵(性黙)으로,호를 수운(水雲)으로 고치시다.
4월 5일 용담에서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으시다.
5월 용담가를 지으시다.
포덕 2년(1861) 6월부터 포덕을 시작하자 어진 선비들과 민중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다.
7월에 포덕문, 8월에 안심가를 지으시다.
11월에 유생들이 서학으로 몰아 관으로부터 탄압이 있자 제자 최중희를 데리고 남정길에 오르시다.
12월 호남지방 남원 교룡산성 隱跡庵에 은거하시다.
포덕 3년(1862) 1월에 권학가와 논학문을
6월에 수덕문과 몽중노소문답가를 지으시다.
7월에 경주부 청송으로 돌아와 박대여의 집에 머무시다.
9월 많은 제자들이 출입하자 경주영장은 대신사를 체포, 이 소식을 들은 도인 5-6백명이 모여 영장에게 항의하자 5일만에 석방하다.
10월 14일 처신을 신중히 하라는 통문을 띄우시다.
11월 9일 흥해 매곡동 손봉조의 집으로 옮기시다.
12월 26일에 연원의 효시가 되는 접주(接主)를 최초로 임명하시다.
포덕 4년(1863) 3월 9일 용담정으로 돌아와 필법을 지으시다.
4월에 좌잠을 지어 강수에게 주시다.
6월에 개접(開接)하여 많은 도인들에 가르침을 베푸시다.
7월 23일 파접(罷接)하시다. 이날 최경상에게 해월(海月)의 도호를 지어주시고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하시다. 하순에 도덕가를 지으시다.
8월 초순에 흥비가를 지으시다.
8월 14일 최해월에게 도통(道統)을 전수하시다.
11월 불연기연을 지으시다.
12월 10일에 조정에서 파견한 선전관 정운구에게 피체되시다. 대신사와 이내겸은 서울로 압송되고 나머지 30명은 경주옥에 하옥되다.
12월 20일 과천에 당도했다가 철종의 국상(國喪)을 당하여 경상감영에 환송되시다.
포덕 5년(1864) 1월 6일에 대구 감영에 수감되시어 20일부터 혹독한 신문(訊問)을 받으시다.
3월 10일 좌도난정률의 누명을 쓰고 대구 관덕당에서 참형을 받아 순도하시다(41세).

해월신사와 은도시대(隱道時代)

해월신사는 험난한 시대적 여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일관된 정성과 피나는 노력으로 도(道)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기의 교단을 일으켜 세워 굿굿이 천도교단을 이끌어 나가신, 실천을 몸으로 보여준 선각자였다.

해월신사의 처음 이름은 최경상(崔慶翔)이다. 그러나 훗날 해월신사 스스로 펼친 법설인 ‘용시용활(用時用活)’, 곧 ‘살아 있는 도(道)란 그 때에 따라 생활 속에서 훌륭하게 적용되고 또 활용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가르침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름을 스스로 ‘시형(時亨)’으로 고쳤다.

조선조가 척신(戚臣)에 의하여 정치적·사회적·경제적인 균형이 깨지고, 그러므로 인심이 나날이 험악해지며, 나아가 국운(國運)이 서서히 기울고 있던 19세기 초·중엽인 포덕 전 33년(1827) 3월 21일 경주 동촌 황오리(皇吾里)라는 작은 마을에서 아버지 최종수(崔宗秀)와 어머니 월성(月城) 배씨(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해월신사는 남의 집 머슴살이에서 제지소(製紙所) 용인(庸人), 또는 화전민(火田民) 등으로 살아가다가, 포덕 2년(1861) 대신사가 경주 용담에서 세상을 건질 새로운 도를 편다는 풍문을 듣고 용담으로 찾아가 대신사를 뵙고는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해월신사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대신사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수련에 임하여 마침내는 천어(天語)를 듣는 깊은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해월신사의 정성과 마음씀을 아는 대신사는 마침내 해월신사에게 포덕 4년(1863) 8월 14일 도통(道統)을 전수하게 된다. 이로써 해월신사는 대신사를 이어 동학의 2세 교조가 된다. 그러나 대신사가 체포되어 대구 장대에서 참형 당한 후 수제자(首弟子)인 해월신사를 잡으려는 관의 추적이 강화되자 이를 피하여 해월신사는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의 깊고 깊은 태백산맥, 소백산맥으로 숨어들게 된다.

이 곳 깊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등에서 해월신사는 36년간을 숨어 지내며 관의 추적을 피해 50 여 곳을 전전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해월신사는 다만 숨어서만 지낸 것이 아니라 흩어진 동학의 교도들을 다시 모아들이고, 또 교단을 정비하여 그 교세를 넓혀가는 한편 스승인 대신사로부터 받은 도(道)에 정진하여 동학의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다. 이와 같은 시기를 천도교에서는 ‘숨어서 도를 펴던 시대’, 곧 은도시대(隱道時代)라고 부른다.

깊고 깊은 산간 벽지 영양(英陽) 용화동(龍化洞)에 숨어 지내던 포덕 13년(1872)에는 이필제(李弼濟)와 더불어 영해(寧海)에서 대신사의 신원(伸寃)을 위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펼쳤으나 실패하여 다시금 더 깊은 태백산 속으로 피하여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산 속에서의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해월신사는 잠시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동학도들에게 바른 수련을 하도록 지도를 하는 한편, 포덕 21년(1880)과 22년(1881)에는 스승인 대신사가 남겨 놓은 경전을 모아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하였다.

이러한 해월신사의 노력은 관의 탄압과 추적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수만 명의 교도를 규합하였고, 마침내는 동학의 교세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던 것이다.

이후 해월신사는 동학의 조직을 보다 체계적으로 공고히 하기 위하여 접(接) 제도를 부활하고, 이어 포(包) 제도를 만들어 전국의 동학 교도를 조직적으로 관장하고 운영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바로 이러한 체계적인 제도를 통하여 해월신사는 공주(公州), 삼례(參禮), 광화문(光化門), 보은(報恩) 등지에서 대대적으로 교조신원운동을 편다. 이들 교조신원운동은 우리나라에 있어 최초로 민의(民意)를 집결시킨 대규모 시위였으며, 지금까지 숨어서만 지내던 동학 교단의 사회와 정부에 대한 대규모 집회였다.

또한 이러한 교조신원운동은 당시 우리나라를 위협하는 외국 세력에 대해 척양척왜(斥洋斥倭)라는 반외세(反外勢)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는 곧 갑오동학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해월신사는 포덕 35년(1894) 갑오동학혁명을 주도하여, 새로운 개벽의 시대를 열어가고자 당시 부패한 조선조, 또는 침략을 앞세우는 일본과의 항쟁을 전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식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에 패하여 도피생활을 하다가, 포덕 39년(1898) 추격하는 관군에 의하여 체포되어, 스승인 대신사와 마찬가지로 형장(刑場) 현재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순도(殉道)하였으니 향년 72세였다.

해월신사는 험난한 시대적 여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일관된 정성과 피나는 노력으로 도(道)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기의 교단을 일으켜 세워 굿굿이 천도교단을 이끌어 나가신, 실천을 몸으로 보여준 선각자였다.

해월신사 약력

포덕전33년(1827) 3월 21일, 경주 황오리에서 탄생하시다.
부친은 경주 최씨(慶州 崔氏) 종수(宗秀), 모친은 월성 배씨(月城 裵氏).
본래 이름은 경상(慶翔), 포덕 16년에 시형(時亨)으로 고치시다.
자는 경오(敬悟), 호는 해월(海月)이시다.
포덕 2년(1861) 35세에 경주 용담에서 입도하시다.
포덕 4년(1863) 7월, 대신사로부터 해월(海月)의 도호를 받으신 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에 임명되시다.
8월 14일, 대신사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으시다.
포덕 8년(1867) 10월, 「양천주(養天主)」의 설법을 하시다.
포덕12년(1871) 3월, 영해에서 교도 6백여명을 동원, 교조신원운동을 하시다.
포덕 13년(1872) 1월, 「대인접물(待人接物)」에 대한 설법을 하시다.
포덕 21년(1880) 5월, 인제군 갑둔리에서 [동경대전]을 간행하시고 6월 15일, 경전 간행 치성제를 행하시다.
포덕 22년(1881) 6월, 단양 남면 샘골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하시다.
포덕 24년(1883) 2월, 충청도 목천에서 󰡔동경대전󰡕 1,000부를 간행하시다.
포덕 25년(1884) 10월, 조직편제의 하나로 6임제(六任制)를 정하시다.
포덕 26년(1885) 9월, 「천주직포설(天主織布說)」의 설법을 하시다.
포덕 31년(1890) 11월, 금릉군 복호동에서 「내수도문」과 「내칙」을 반포 하시다
포덕 32년(1891) 10월, 「임사실천(臨事實踐) 10개조」를 반포하시다.
포덕 33년(1892) 10월에 공주에서, 11월에 삼례에서 교조신원운동을 하시다.
포덕 34년(1893) 1월, 「천지부모」에 관한 통유문을 반포하시다.
2월, 교조신원을 위해 광화문전에서 복합상소,
3월, 보은 장내리와 전라도 원평에서 3만명이 모여 척왜양창의 운동을 하시다.
포덕 35년(1894) 3월 21일, 백산에서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대접주가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 동학혁명의 깃발을 올리다.
5월, 청일양군(淸日兩軍)이 상륙하여 주권을 침해하자 9월 18일, 해월신사는 옥천 청산에서 총기포령을 내려 항쟁에 나서게 하다.
12월, 공주전투를 고비로 일본군의 신식무기에 밀려 혁명운동은 잠정상태로 들어가다.
포덕 38년(1897) 4월 5일, 「향아설위」의 의식을 행하시다.
12월 24일, 도통을 의암성사께 전수하시다.
포덕 39년(1898) 4월 5일, 원주 송골에서 관헌에게 피체되시어
6월 2일, 한성(경성)감옥에서 72세를 일기로 교수형으로 순도.

의암성사와 현도시대(顯道時代)

의암성사는 포덕 46년(1905)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온 천하에 선포하였다. 따라서 동학은 은도(隱道)의 시대를 벗어나 현도(顯道)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의암성사는 거족적인 3·1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의암성사의 이름은 손병희(孫秉熙)이다. 의암성사는 포덕 2년(1861) 충청도에서 태어났다. 호방한 젊은 날을 보내던 의암성사는 동학이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새로운 세상인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커다란 종교적인 목적을 지닌 도라는 말을 듣고는 포덕 23년(1882)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이후 의암성사는 호방했던 일상생활을 일시에 청산하고, 전도인(傳道人)으로부터 받은 주문 21자를 매일 3만 독(讀)씩 읽고 외우며 지극한 수련에 임하였다. 또한 이와 같이 주문을 읽는 틈틈이 매일 짚신 두 켤레씩을 삼았으며, 이 짚신을 한 달에 여섯 번 5일만에 열리는 청주 장(場)에 나가 팔았다. 이 같은 생활을 3년간이나 시행 하였다. 즉 주문을 통한 수련으로 일관된 생활을 해나갔던 것이다. 이후 의암성사는 해월신사를 모시고 공주 가섭사(伽葉寺), 익산 사자암(獅子庵), 그리고 풍천 용문사 등에 들어가 독공(篤工) 수련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의암성사의 지극한 종교적인 수행은 훗날 그 많은 업적을 이루게 하였던 원동력이 되었다.

동학혁명 당시 의암성사는 동학군의 통령(統領)으로 진두 지휘를 하며 활약하기도 한다. 이후 해월신사를 모시고 관의 추적을 피해 원주(原州), 여주(驪州) 등지를 전전하게 된다. 37세가 되던 포덕 38(1897)년 12월 24일 해월신사로부터 도통(道統)을 전수받고 천도교의 3세 교조가 되었다.

종통을 이어받은 의암성사는 교단을 재수습하는 한편 세계 정세를 살피기 위하여 해외로 떠나던 중, 일본에 머물면서 여러 지사(志士)들과 국사를 의논하고 또 교인 수습책을 강구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의암성사는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깊이 절감하고 교인 청년 중 우수한 인재를 뽑아 일본에 유학을 시키는 등 꾸준하게 재기를 위한 준비를 하였다.

포덕 45년(1904)에 노일전쟁(露日戰爭)이 발발할 기미가 보이자 국내 동지들에게 지시하여 진보회(進步會)를 조직, 교인들을 규합시키는 한편, 이 해 8월에 전국의 회원으로 하여금 일제히 머리를 깎고 옷을 간편하게 하는(斷髮黑衣) 등 신문화 운동을 일으키는 동시에 기우는 국운(國運)을 혁신하고자 개혁과 신문화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후 포덕 46년(1905)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온 천하에 선포하였다. 따라서 동학은 은도(隱道)의 시대를 벗어나 현도(顯道)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의암성사는 포덕 47년(1906) 1월 귀국하여 천도교 중앙총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또 각 군에 교구를 설치하여 근대적 종교체계를 갖추는 한편, 진보회를 일진회(一進會)로 규합하여 친일 행각을 벌인 이용구등 60여 명의 친일 간부 교인들을 출교 처분하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포덕 51년(1910) 일제의 강점으로 우리 나라는 일제로부터 치욕적인 통치를 당하게 된다. 이처럼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 의암성사는 우이동에 봉황각(鳳凰閣)을 짓고 천도교의 전국 교역자들로 하여금 이 곳에서 일곱 번에 걸쳐 이신환성(以身煥性)의 법설과 함께 49일 수련을 실시하여 신앙통일, 규모일치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수련은 곧 정신력의 단결과 조직의 강화를 기하기 위한 것으로서, 뒷날 3·1 독립운동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즉 의암성사는 이미 10년 가까운 기간을 3·1 독립운동을 위하여 그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포덕 60년(1919) 1월 5일을 기하여 전국의 교인들에게 일제히 49일 특별기도를 명하여 3·1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정신무장을 시킨 후 3월 1일 거족적인 3·1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3·1 독립운동의 영도자로 일제에 의하여 구금된 의암성사는 옥중에서 고문으로 병환을 얻게 되어 이후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그 병세가 악화되어 포덕 63년(1922) 상춘원(常春園)에서 환원(還元)하였다. 즉 수운대신사나 해월신사와 마찬가지로 의암성사 역시 억압받는 민중과 민족을 위하여 혼신의 정성과 힘을 다하다가 장엄하게 순도(殉道)하였던 것이다. 향년 62세였다.

의암성사 약력

포덕 2년(1861) 4월 8일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주리에서 탄생
포덕 23년(1882) 東學에 입도
포덕 35년(1894) 해월신사(천도교 제2세 교조)의 명에 따라 전봉준 장군과 같이 동학혁명을 지도
포덕 37년(1896) 해월신사로부터 의암(義菴) 도호를 받음
포덕 38년(1897) 12월 24일 해월신사로부터 道統 전수 (천도교 제3세 교조 되시다)
포덕 42년(1901) 일본에 계시면서 국내 청년 64명을 선발
일본에 유학시켜 인재를 양성
포덕 45년(1904) 국내개혁을 목적으로 동학교도로써 진보회를 조직 ‘단발흑의’의 갑진 개화혁신운동을 전개
포덕 46년(1905)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 하고 천도교 대헌 및 궁을기 제정
포덕 47년(1906) 일본에서 귀국, 천도교중앙총부를 설립함과 동시에 72개 대교구를 설치
9월에 일진회 가담 친일두목 62인을 출교
포덕 51년(1910) 보성학원(보성전문, 중학, 소학) 인수, 「천도교회월보」간행
포덕 53년(1912) 우이동에 鳳凰閣을 건축, 지방두목 483명을 7회에 걸쳐 수련
포덕 60년(1919) 3월 1일을 기하여 민족을 영도, 독립운동을 전개
포덕 63년(1922) 5월 19일 옥고로 순도순국 하시니 향년 62세.

춘암상사와 문화운동시대

춘암상사는 3.1독립운동 당시 48인의 한 사람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포덕 63년(1922) 의암성사가 환원하자, 교내의 모든일을 중의에 맡기고 정신적인 지도자로 남게 되었다.

춘암상사의 이름은 박인호(朴寅浩)이다. 포덕 전 5년(1855) 2월 1일 충남 덕산군 장촌면 막동리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순박하며 원만한 춘암상사는 29세가 되던 포덕 24년에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이후 10년간 밤낮으로 의관을 벗지 않고 생선, 고기, 술, 담배 등을 끊고는 정성으로 수련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잠이 깊이 들까 염려하여 낫자루를 베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깨어서 주문을 외웠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해월신사의 지도를 받아 공주 가섭사에 들어가 49일의 수련을 하는 등 장차 지도자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동학혁명 당시에는 덕의대접주(德義大接主)로 충청도 일대의 동학군을 통솔하여 참가하였다.

그 후 포덕 42년(1901)에는 경도주(敬道主)가 되었고, 교장(敎長), 중앙총부 고문, 금융관장(金融觀長), 경도사(敬道師) 등의 직책을 두루 지냈다. 포덕 48년(1907) 12월 10일 천도교의 차도주(次道主)가 되었다가 포덕 49년(1908) 1월 18일 대도주(大道主)의 종통(宗統)을 선수받아 천도교의 4세 대도주가 되었다.

춘암상사는 대도주가 된 이후 천도교 중앙총부의 지도체제를 새롭게 갖추고, 교세 확장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포덕 51년(1910), 우리 나라는 일제로부터 강점을 당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고, 이러한 아픔을 이겨내기 위하여 일제의 억압과 감시 속에서도 춘암상사는 의암성사의 뜻을 받들어 출판문화와 교육활동에 주력하였다. 특히 중앙총부 부설로 당시로서는 최신형 인쇄소를 설치하여 천도교가 문화운동을 주도해 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기도 한다. 또한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 등을 인수하여 경영하는가 하면, 사회 성인교육의 일환으로 전국에 800여 개의 교리강습소를 설치 운영하여 민족 교육에 앞장서게 된다.

춘암상사는 3·1 독립운동 당시 천도교의 중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민족 대표에서는 빠졌지만, 48인의 한 사람으로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포덕 63년(1922) 의암성사가 환원하자, 교내의 모든 일을 중의(衆議)에 맡기고 정신적인 지도자로 남게 되었다.

그 후 일제가 만주를 침범하는 등 군국주의 통치가 심화되던 포덕 79년(1938), 지방의 교역자들을 불러 일제 패망을 기원하는 특별기도를 지시하였다. 이것이 곧 무인멸왜기도(戊寅滅倭祈禱)운동이다. 그 후 춘암상사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굴하지 않고 천도교를 지켜오다가, 포덕 81년(1840) 4월 3일 환원하였다. 향년 86세이다.

이후 천도교는 춘암상사의 환원(還元)과 함께 그 간 논의되어 오던 중의제(衆議制)에 의하여 교령(敎領)을 선출하는 체제로 전환하여 3년마다 교령을 선출하여 천도교 교단의 행정적·정신적 지도자로 천도교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러한 제도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어, 지금도 매 3년마다 교단의 대의원들이 모여 전국대회를 통하여 교령을 선출하고 교단의 모든 것을 위임하여 교단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춘암상사 어록

『거짓말 하지 말라 거짓에 죽고 참에 살리라』
『제 할일을 다 하고 제 잠을 다 자고 도는 언제 닦겠는가』
『벙어리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유형한 사람을 섬기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무형한 한울을 섬기랴』

춘암상사 약력

포덕전 5년(1855) 2월 1일 충청도 덕산군 장촌면 막동에서 탄생하시다.
처음 이름은 박용호(朴龍浩), 고친 이름은 인호(寅浩), 자는 도일(道一), 호는 춘암(春菴)이시다.
아버지는 박명구, 어머니는 방씨이시다.
12세때 남씨 부인과 결혼하시다.
29세에 동학에 입도하시어 의관을 벗지 않으시고 10년간을 독공수련 하시다.
포덕 35년(1894) 갑오동학혁명 기포에 참가하시어 5만의 동학군을 통솔하시며 덕의대접주로 활약하시다.
포덕 48년(1907) 차도주직을 받으시다.
포덕 49년(1908) 1월 18일 대도주직을 선수 받으시다.
포덕 60년(1919)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의 한 분으로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어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르시고 이듬해 10월 31일에 출옥하시다.
포덕 79년(1938) 멸왜기도를 지도하시다.
포덕 81년(1940) 4월 3일 환원하시니 향년 86세 이시다.